기고글 2018. 5. 1. 23:30

농촌으로 이사 와서 백일을 지내며(2011.07.12)

 농촌 마을로 이사를 온 지 백일이 되었다. 우리 마을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이 반원처럼 마을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고, 마을 앞에는 동네 사람들 먹고 살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만큼의 논이 있는, 50가구 남짓이 사는 작지도 크지도 않는 마을이다. 농사의 주력은 여전히 감농사지만 지금은 묵혀버리는 과수원이 생겨나고 있는, 노인들이 마을의 주인인 그런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한때 이 마을은 120호가 넘었다고 한다. 시골마을치고는 아주 큰 동네였을 것이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어렵다보니, 한 집 두 집 도회지로 나가고 지금은 집들도 듬성듬성 남아 있다. 무너진 빈 집 터는 텃밭으로 이용해왔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비워둔 곳이 많다.
 평소 우리 마을은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초등학생도 없다. 아니 책가방 메고 아침에 나가는 학생을 나는 아직 이 동네에서 보지를 못했다. 아이들 소리는 주말이나 휴일이 되어야 다니러 오는 젊은 가족들이 있어 들을 수가 있는 것이 지금의 시골 마을이다.
 농촌 생활을 하면서 새롭게 내가 만든 규칙이 하나 있다. 주말이나 휴일 아침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기계는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사 오고 한동안 땔나무를 장만하기 위해 기계톱을 많이 썼고, 지금은 밭과 집 주변의 잡초 때문에 풀베는 기계를 많이 쓴다. 평일 아침에는 일찍부터 일터로 나가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휴일에는 다니러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 이런 기계는 쓰지 않는 것이 내가 터득한 공동체의 규칙이다. 그래서 나는 금요일을 집안일 하는 날로 정했다. 주말에는 나를 찾는 손님도 적지 않고, 이 곳 생활에서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배려이기도 하다. 
 어제는 마을 어른 몇 분과 강둑에서 낙동강의 불어난 물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보일러 기름 값 이야기를 내가 먼저 꺼냈다. 도시에서는 난방과 취사를 다해도 가스비가 월 10만~15만 원이면 충분했는데, 여기서는 4월 한 달에만도 기름 값이 20만 원이 넘게 들었다고 말을 했다. 이대로면 겨울에는 기름값이 한 달에 50만 원도 더 들겠다는 걱정도 했다. 내 말을 되받아 하시는 그분들 대답이 더 놀라왔다. 
 시골에서 기름보일러 따뜻하게 불 때며 사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이셨다. 초저녁에 잠깐 틀었다가 끄고, 잘 때는 전기장판 한 장에 의지해 이불 뒤집어쓰고 잔다고 하셨다. 제대로 보일러를 트는 때는 설명절 자식들이 올 때 뿐이고, 아이들 가고 나면 바로 보일러 끈다고 하셨다. 명절 지나고 줄어든 기름 때문에 부부싸움을 할 때도 많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그러나 농촌 생활이 주는 좋은 점도 있다. 새소리와 더불어 아침을 맞는 것은 이런 시골 생활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한다. 아침잠이 많은 나지만 이곳에 오고부터는 새벽 다섯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멀리서 우는 뻐꾸기 소리, 조금 가까이서는 목이 조금 쉰 듯한 꿩 우는 소리, 가까이 대밭과 팽나무 가지에서 나는 이름도 모를 수많은 새들의 합창 소리가, 이들에게 미안해서 더 드러누워 있을 수가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삶은 현실이다. 왜 젊은 사람은 도회지로 나가고 농촌에는 나이든 노인들만 사는가 하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하게 된다. 문화적인 혜택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먹고 사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동네에 구멍가게 하나도 없어 라면 하나를 사려고 해도 대처로 나가야 하고, 학교를 보내는 문제만 해도 부모가 직접 학교까지 태워다주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 흔한 학원조차도 없는 이곳 시골 생활에서 어떻게 젊은 사람들이 가끔씩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 수 있겠는가?
 푹푹 찌는 한여름의 초입에 벌써 겨울 난방비 걱정을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사 온 지 석 달 만에 가장 심각한 시골 생활의 어려움을 하나 꼽으라면 이것을 말하고 싶을 정도로 난방비는 심각하다. 스무 평도 안되는 작은 농촌 주택에서 살면서 말이다.
 정치를 지켜봤고 선거를 치러봐서 잘 안다. 농산어촌 시골 마을 노인들의 표는 많지가 않아 힘이 없을 것 같고, 시골에 부모 친지를 둔 도회지의 자식들까지 다 하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내년에 총선과 대선이 있다. 농산어촌 시골 마을에 난방과 농사용 기름 값 내려주겠다는 후보를 찾아야겠다. 도시 난방비와 비교해서 이런 곳에 사람이 돌아와서 살도록 하자면 1리터당 1300원이 넘는 난방용 기름 값이 500원까지 내려와야 될 것이다.

 

http://www.gnnews.co.kr/news/view.html?skey=%EB%B0%95%EC%A2%85%ED%9B%88&x=-1117&y=-80&smode=110&page=2&section=110&category=237&no=120839



기고글 2018. 4. 30. 23:32

이제 절약의 실천으로 핵위험을 극복하자(2011.04.14)

아침 뉴스에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의 평가가 최악의 단계인 레벨 7로 격상된다고 했다. 레벨 7은 지난 1986년 옛 소련의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원전 폭발사고와 동일한 평가이다. 땅 넓은 소련이었기에 망정이지 우리 나라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되물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사고가 이웃 일본에서 났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의 서해안이었으면 어땠을까? 지금도 황사로 해서 중국을 원망하는 때가 많지만 만약 중국의 동해안에서 원전 사고가 났다면, 그래서 편서풍으로 그 낙진이 고스란히 우리나라로 몰려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유사한 사고가 났다면 어떨까? 일본의 도쿄는 후쿠시마와 230km 이상 떨어져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창원이 고리와 월성 원자력 발전소와는 50km, 진주가 80km 이내에 위치해 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런 사고가 났을 때 창원시와 진주시는 시민들을 긴급히 대피시키고 방사능 낙진 오염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매뉴얼을 지니고 있는가?
 어제 저녁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한 시민 단체의 핵방사능 대책회의에 참석해서, 앞에서 말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깊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우리는 너무 무감각하지 않은가? 원자력 발전이 아무리 안전하고 깨끗하다손쳐도 이제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우리가 TV로 보며 참 좋다고 감탄을 연발하는 강원도 동강의 그 자연조차도 방사능 낙진을 이길 수는 없다.
 원자력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핵발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로 이에 대한 대체 에너지가 마땅하지 않다는 주장을 한다. 여기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풍력과 조력, 그리고 햇빛이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한 특강에서 재생 에너지 전문가는 우리나라와 같이 삼면이 바다인 나라는 자연 여건이 풍력 발전에 매우 유리하고, 서해안과 같이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곳은 조력 발전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분들은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빛과 열 또한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더 연구하면 많은 양의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주장하는 에너지원은 모두가 불순물과 위험한 폐기물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핵발전은 그 자체의 위험성도 있지만 폐기물 처리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정부는 이에 대한 자료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필자는 에너지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나 핵발전이 위험하고 이제는 그 위험성이 현실로 다가와서, 안전한 대체 에너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는 사실을 겨우 인식하는 정도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서 그 기술적인 부분은 더더욱 잘 모른다. 
 그러나 에너지 절약을 통해서 방사능 위험도 줄이고 지구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전기든, 물이든, 기름이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조금씩이라도 아끼는 것은 우리의 작은 다짐만으로 가능하다. 요즘 나오는 공익광고처럼 비닐봉지 들지 말고 장바구니 들고, 엘리베이트 버튼 누르지 말고 계단 손잡이 잡고 오르며 조금씩이라도 아낀다면, 그것에서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조금 아껴서 나무 두 개 자를 것을 하나만 자르게 해도 환경 보호가 되고, 그것이 모여 원자력 발전소 두 개 지을 걸 하나만 짓게 한다면 그것은 큰 환경운동이 되는 것이다. 
 최근 필자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창녕군 부곡면의 한 농촌 마을로 작은 집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부엌은 덜한데 목욕탕에서 더운 물 수도꼭지를 틀면 한참을 기다려야 따뜻한 물이 나온다. 이유를 찾아보니 배관 선로의 문제였다. 보일러에서 부엌을 거쳐 다시 화장실까지 배관이 연결되어 있다 보니 더운 물이 중간에서 열을 다 뺏기게 되어 있었다. 
 재시공에 드는 비용과 수도 요금의 관계를 고민하다, 어제 저녁에 재시공으로 결정을 했다. 일년, 이년을 살 집이 아니니 경제적 비용도 장기적으로 보면 더 이익이 되리라 판단했고, 더욱이 그렇게 해서 낭비되는 물과 기름의 양을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생각도 한 몫을 했다. 
 선진국의 에너지 정책은 소비를 줄이는 정책이고, 후진국은 생산을 늘리는 것이라고 들었다. 선전국의 교통 정책은 대중교통의 편의성을 확보하는 정책이고, 후진국은 차량과 도로를 늘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정책과 실천으로 핵방사능의 위험을 극복하자.

 

http://www.gnnews.co.kr/news/view.html?skey=%EB%B0%95%EC%A2%85%ED%9B%88&x=-1117&y=-80&smode=110&page=2&section=110&category=237&no=120873


나의 이야기 2018. 4. 30. 23:21

“박 선생, 그러다 책이 없어지면…”

도서관을 새로이 단장을 하고 나니 학생들이 많이 나들기 시작했다. 서로 인연이 맞았던 것일까. 나는 수업갈 때도 도서관 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 놓고 다녔다. 학생들이 책 보러 왔다가 헛걸음 할 일이 없었다. 학생들은 도서관에 왔다가 문이 잠겨 있으면 그 다음에는 잘 오지 않는다. 두 번째 왔는데 또 잠겨 있으면 그 학생은 도서관과는 영영 이별이다. 

일부 선생님들께서는 내가 도서관 문 열어 놓고 다닌다고 처음에는 좀 불안해 하셨다. “박 선생, 그러다 책이 없어지면….” 나는 선생님들께 “책은 한 번 사면 영원히 남는 게 아니라 없어지면 다시 사야 되는 소모품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라고 설득을 했다. 이렇게 해서 계속 문을 열어 놓고 다녔는데 없어지는 책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교장, 교감 선생님이 이해해 주시지 않으셨으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도서관에 찾아와서 책을 읽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개교 이래 나는 ‘폭력 교사’였다. 그런데 도서관을 맡으면서 폭력성이 사라졌다. 도서관에 드나드는 아이들은 무조건 좋아보였다. ‘내가 도서관 문을 조금이라도 빨리 열면 이 녀석들도 빨리 와서 책을 볼 것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책 읽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출근을 서두를 정도였다. 내가 빨리 오면 아이들은 아침 자율학습시간 전에 와서 책을 읽었다. 초기 문성고 졸업생과 당시 졸업생에게 비치는 나의 전혀 다른 이미지는 당시의 책과 도서관이 그 경계가 되었다. 

돈 2천만원을 들여서 학교도서관을 바꾸니 아이들에게 책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제 발로 찾아와서 책을 읽는데, 다른 학교도 이렇게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무슨 방도가 없을까? 이런 생각을 막연히 하게 되었다. 좋은 일은 혼자 감춰놓고 즐기는 게 아니지 않는가. 

내가 마음을 좋게 썼던 덕이었을까? 아이들도 책을 읽는 기회가 생겼지만, 나 역시 리모델링한 학교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에 ‘사회적 합의의 노동정치’라는 주제로 논문을 완성해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6월 즈음에 논문이 완성되었다. 학교도서관을 맡은 지 2년도 안 되어 나는 박사학위라는 내 본래의 목적과 학생과 책을 친구로 묶어주는 교육 목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된 것이다. 

내가 박사학위를 딴 까닭, 또는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교육과 운동과 학문 셋을 서로 연관짓고 싶었다. 자랑 같아 민망하지만 우리 집안의 아들 4명이 다 박사다. 내가 제일 늦었다. 교육열이 유달리 강했던 아버님은 디스크 증세로 일상 생활조차도 불편했던 내게, “공부하라”는 말씀을 유언처럼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박사과정에 등록한 1995년 돌아가셨다. 따뜻한 5월이었다. 
아버님의 말씀도 있었지만 김영삼 정권 들어서 시민사회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운동권에서도 전문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게다가 나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아둔한 면이 있는지라 ‘나라고 못 할 것 있나?’ 하면서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 과정에 등록을 했다. 강문구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셨다. 내 전공은 ‘비교정치’다. 석사학위 논문의 소재도 전교조와 한국교총의 비교였다.


2009.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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