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동정 2018. 5. 15. 23:37

오늘 하루 현장을 다녔습니다.

오늘 현장방문을 통하여 인사를 나누면서 경남교육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교육 이야기 2018. 5. 7. 19:44

2018 경남 어린이날 행사 방문 영상

2018 경남 어린이날 행사 방문 영상입니다.

경남과학교육원과 명서초등학교 그리고 경남수학문화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기고글 2018. 5. 3. 23:36

낙동강 친수공간을 바라보는 청개구리(2011.08.09)

낙동강가에 사는 덕에 매일 그 강을 옆으로 끼고 다닌다. 주변 경관이 좋기도 하지만,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해가 지는 때다. 귀가하는 방향이 마침 서쪽이기도 해서 더욱 그렇다. 가끔씩은 집을 지나서 임해진까지 더 달려가기도 한다. 깎아지른 절벽길을 느린 속도로 운전하며 하늘의 지는 해와 강에 비치는 노을을 같이 보는 때면, 어릴 적 황금빛으로 저녁을 맞던 내 고향 동네 적석산의 모습에 견줄만큼 내겐 황홀한 그림으로 다가온다. 
 4대강 사업이 겉모양이 바뀌고 있다. 달포 전부터 ‘준설 완료, 친수공간 조성’이라는 플래카드가 강가와 강 가운데 인공섬에 아주 크게 새겨져 있다. 폭풍 같은 모래 먼지와 굉음을 내며 달리던 대형 덤프트럭이 거의 없어졌다. 
 준설 완료야 강바닥의 모래를 목표치만큼 파냈다는 것으로 쉽게 이해가 되었지만, 친수공간 조성이라는 말은 내겐 많이 낯설었다. 주변의 환경운동가에게 물으니, 강가에 탐방로, 놀이공간, 체육시설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하, 그래서 내가 다니며 바라보는 강 가운데 인공섬에 얼마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뭔가를 심고 가꾸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 모습이 정리가 됐다. 체육공원과 산책로라는 것은 인근 창녕 길곡을 지나며 강쪽을 바라보면 이미 부분적으로 만들어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얼마 전 장마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환경운동하시는 분 몇 분과 함께 삼랑진에서 합천보까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 구간에는 함안보와 합천보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내가 본 낙동강 친수공간 사업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모래 위에 지은 집, 이른바 ‘사상누각’이었다. 
 함안보도 합천보도 홍수로 유실된 생채기를 우선 안보이게 하는 눈가림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거적과 잡초로 위장해 놓은 준설하고 남은 경사지는 씻겨 내려가지 않은 곳이 없었고, 낙동강에 합류하는 작은 하천이 받은 상처는 그 동네 주민의 입을 빌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합천보 상류의 덕곡천은 복구 불가능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를 10여 년 전부터 나들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평균 1년에 두 세 차례 낙동강은 홍수를 겪는다. 강바닥을 파내서 그런지 올해 장마 때는 평년보다 더 많은 비가 왔지만 낙동강 본류가 홍수로 넘치지는 않았다. 상류 지역에 비가 많이 오면 낙동강은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도록 수량이 많아진다. 평소에는 강 가운데 큰 섬이 보이지만 비가 많이 오면 건너편 창원쪽까지 강폭이 1 km가 넘게 물이 차면서 강이 거의 바다가 된다. 지난 번 장마 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 놓은 탐방로는 지붕까지 물이 찼고, ‘준설 완료, 친수공간 조성’의 플래카드도 물에 잠겼다. 
 이번에는 잠겼던 탐방로에 물이 빠지면서 급하게 씻고 고쳐서 복구를 했고, 씻겨 내려간 인공섬도 다시 잔디를 심고 또 나무도 심어서 급하게 상처를 감추었지만, 앞으로도 물만 넘치면 그렇게 신속하게 씻고 닦고 다시 심어서 시민들게 보여 줄 것인가. 1년에 세 번 이상일 수 있는 일을 말이다. 
 필자는 토목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강의 안쪽은 언제나 물에 잠길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모래는 물살이 세면 씻겨가게 되어 있다. 그 안에 탐방로를 만들고 체육공원을 만들고 놀이 시설을 하면 우선 보기는 참 좋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시설을, 농사짓기에 바쁜 강가의 주민들이 얼마나 이용할 것이며, 홍수에 잠겼다 물이 빠지면 청소와 관리는 누가 할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겐 걱정일 뿐이다. 한눈에 봐도 수만 평이 넘는 그 공간을 물과 햇빛만 있으면 과수보다 훨씬 잘 자라는 그놈의 잡초는 또 누가 베어낼 지, 백 평 남짓 농사를 짓는 내가 생각해도 걱정과 함께 한숨부터 나온다. 
 교육운동가가 아니고 더욱이 환경운동가도 아닌 시골의 한 촌부가 느끼는 이런 마음은, 오늘 점심 때 모여서 같이 밥을 먹었던 여섯 명 이웃 사람 모두의 하나같은 마음이었다. 태풍 ‘무이파’의 영향으로 이 저녁 비바람이 우리 동네를 휘둘러 지나가고 있다. 모래 위에 항구적인 시설물이 가능한 것인지 오늘 밤은 또 걱정이다.



나의 이야기 2018. 5. 3. 23:10

내가 가르쳐 본 과목

나는 수학 영어 말고는 안 가르쳐 본 과목이 없는 것 같다. 개교 당시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석사 학위 이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딱 두 사람, 국어과 김혜란 선생님과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한 학사였다. 김혜란 선생님은 국어과라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사회 과목만으로는 규정된 시간을 채울 수 없었다. 그러니 몇몇 과목, 시간 강사를 쓸 수 있는 교과를 빼고는 다 내 차지였다. 


1985년 3월, 그러니까 개교 2년째다. 신입생이 입학을 했는데 교가를 가르칠 선생님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옥상으로 신입생 전부를 데리고 올라가서 교가를 가르쳤다. 그 해 처음 오신 선생님들은 아마 내가 음악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곧 드러나고 말았지만. 


1985년 2학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금요일 하루는 내가 맡은 수업이 다섯 시간이었는데 매 시간 다른 책을 가지고 들어갔던 때가 있었다. 사회1, 사회2, 윤리, 공업, 한문 다섯 과목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다. 교재 연구가 제대로 안돼서 진땀을 흘리며 수업을 한 날도 있었고, 다른 교재를 들고 들어간 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만물 박사였던지, 아니면 대충 때웠던지 둘 중에 하나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한테 미안할 뿐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 내가 들어갈 교실을 찾지 못해 아래 위층을 헤매다 땀이 흥건한 채 잠을 깨곤 한다. 20년이 더 지난 이야기다. 힘들었지만 열정 하나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이라면 그 때 만큼 열심히 할 자신은 없다. 


가장 해내기 힘들었던 과목은 한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회와 윤리야 전공이었고, 음악도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노래방에서 박상철의 ‘황진이’를 부르면 노래 잘한다는 소리 안하는 사람이 없다. 공업은 당시 과목 이름이 ‘정보 사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두 분 다 공업 선생님이셔서 그랬던지, 어떻든 자신이 있었다. 참고서 두 권 정도 읽고 가면 무난히 때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한문은 달랐다. 시간이 없으니 모든 글자의 부수와 획수를 익히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학생 누군가가 그걸 물으면 답이 없었다. 자습서를 밑에 깔고 아이들에게는 눈속임을 하며 진땀을 흘린 기억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 2018. 5. 2. 21:45

풀리지 않는 그 무엇, 그 해결을 위해

내가 ‘박사님’이 되니까 우리 집안의 ‘선배 박사’들이 “박사학위를 딴 것은 새로운 시작에 불과하고 이제부터는 사회에 봉사해야 된다”고 점잖게 충고를 했다. 우리 집안의 막내인 내 남동생 내외는 미국에서 각각 전자전기, 생물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학문적 선진국으로서의 미국의 정서와 최근 분위기를, 특히 지역공동체와 봉사활동의 관계를 거듭 강조했다. 나도 우리 사회에서 ‘교육’ 문제를 부둥켜안고 20년 넘게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고민과 번민을 거듭하며 나름대로 교육 운동을 해 온 사람으로서, 동생의 제언에 용기와 함께 작은 오기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어쨌든 내 머리 속 한 구석에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당위가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이때까지 내 시야에는 학교와 학생, 교육운동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었고,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전교조를 선택했다. 하지만 전교조로서도 풀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전교조가 합법화됐지만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학교가 요구하는 것은 공부 잘 하는 아이와 명문대 진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 역시 우리 교육이 정상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학교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많았다. 상위 10%가 아닌 평범한 다수의 학생들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우리 교육계를 위해서 내가 배운 것을 써 먹고 싶었다. 내 스스로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박사학위 논문의 소재는 우리나라 최초로 노사정 합의로 이루어진 1기 노사정위원회 활동이었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하나의 의견과 주장이 돼 제대로 실현이 되는 것은 없었다. ‘국가 부도’라는 위기 앞에서 나온 노사정 합의가 노사정위원회였다. 

나는 우리 교육계의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모아 토론하고 설득해서 합의를 이끌어내고 실제 현실에서 차근차근 변화를 만들어 나가고 싶었다. 참교육을 내걸며 전교조가 세상에 나오면서, 한국교총은 과거에 비해 선명성과 대표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부는 무너지는 공교육을 정상화하기는커녕 변화하는 현실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6개월 넘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다 ‘교육위원’ 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결심을 하고 나니 마침 교육위원 선거제도까지 바뀌고 있었다. 이전 교육위원 선거에서는 학교운영위원장들이 교육위원을 선출했는데, 2002년 교육위원 선거에서는 학교운영위원들 전부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렇게 되면 승산이 있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1996년 학교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사와 학부모가 학교운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긴 제도였다. 나로서는 학교운영위원 가운데 상당수가 학교의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자산이었다.


기고글 2018. 5. 1. 23:30

농촌으로 이사 와서 백일을 지내며(2011.07.12)

 농촌 마을로 이사를 온 지 백일이 되었다. 우리 마을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이 반원처럼 마을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고, 마을 앞에는 동네 사람들 먹고 살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만큼의 논이 있는, 50가구 남짓이 사는 작지도 크지도 않는 마을이다. 농사의 주력은 여전히 감농사지만 지금은 묵혀버리는 과수원이 생겨나고 있는, 노인들이 마을의 주인인 그런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한때 이 마을은 120호가 넘었다고 한다. 시골마을치고는 아주 큰 동네였을 것이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어렵다보니, 한 집 두 집 도회지로 나가고 지금은 집들도 듬성듬성 남아 있다. 무너진 빈 집 터는 텃밭으로 이용해왔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비워둔 곳이 많다.
 평소 우리 마을은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초등학생도 없다. 아니 책가방 메고 아침에 나가는 학생을 나는 아직 이 동네에서 보지를 못했다. 아이들 소리는 주말이나 휴일이 되어야 다니러 오는 젊은 가족들이 있어 들을 수가 있는 것이 지금의 시골 마을이다.
 농촌 생활을 하면서 새롭게 내가 만든 규칙이 하나 있다. 주말이나 휴일 아침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기계는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사 오고 한동안 땔나무를 장만하기 위해 기계톱을 많이 썼고, 지금은 밭과 집 주변의 잡초 때문에 풀베는 기계를 많이 쓴다. 평일 아침에는 일찍부터 일터로 나가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휴일에는 다니러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 이런 기계는 쓰지 않는 것이 내가 터득한 공동체의 규칙이다. 그래서 나는 금요일을 집안일 하는 날로 정했다. 주말에는 나를 찾는 손님도 적지 않고, 이 곳 생활에서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배려이기도 하다. 
 어제는 마을 어른 몇 분과 강둑에서 낙동강의 불어난 물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보일러 기름 값 이야기를 내가 먼저 꺼냈다. 도시에서는 난방과 취사를 다해도 가스비가 월 10만~15만 원이면 충분했는데, 여기서는 4월 한 달에만도 기름 값이 20만 원이 넘게 들었다고 말을 했다. 이대로면 겨울에는 기름값이 한 달에 50만 원도 더 들겠다는 걱정도 했다. 내 말을 되받아 하시는 그분들 대답이 더 놀라왔다. 
 시골에서 기름보일러 따뜻하게 불 때며 사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이셨다. 초저녁에 잠깐 틀었다가 끄고, 잘 때는 전기장판 한 장에 의지해 이불 뒤집어쓰고 잔다고 하셨다. 제대로 보일러를 트는 때는 설명절 자식들이 올 때 뿐이고, 아이들 가고 나면 바로 보일러 끈다고 하셨다. 명절 지나고 줄어든 기름 때문에 부부싸움을 할 때도 많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그러나 농촌 생활이 주는 좋은 점도 있다. 새소리와 더불어 아침을 맞는 것은 이런 시골 생활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한다. 아침잠이 많은 나지만 이곳에 오고부터는 새벽 다섯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멀리서 우는 뻐꾸기 소리, 조금 가까이서는 목이 조금 쉰 듯한 꿩 우는 소리, 가까이 대밭과 팽나무 가지에서 나는 이름도 모를 수많은 새들의 합창 소리가, 이들에게 미안해서 더 드러누워 있을 수가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삶은 현실이다. 왜 젊은 사람은 도회지로 나가고 농촌에는 나이든 노인들만 사는가 하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하게 된다. 문화적인 혜택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먹고 사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동네에 구멍가게 하나도 없어 라면 하나를 사려고 해도 대처로 나가야 하고, 학교를 보내는 문제만 해도 부모가 직접 학교까지 태워다주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 흔한 학원조차도 없는 이곳 시골 생활에서 어떻게 젊은 사람들이 가끔씩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 수 있겠는가?
 푹푹 찌는 한여름의 초입에 벌써 겨울 난방비 걱정을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사 온 지 석 달 만에 가장 심각한 시골 생활의 어려움을 하나 꼽으라면 이것을 말하고 싶을 정도로 난방비는 심각하다. 스무 평도 안되는 작은 농촌 주택에서 살면서 말이다.
 정치를 지켜봤고 선거를 치러봐서 잘 안다. 농산어촌 시골 마을 노인들의 표는 많지가 않아 힘이 없을 것 같고, 시골에 부모 친지를 둔 도회지의 자식들까지 다 하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내년에 총선과 대선이 있다. 농산어촌 시골 마을에 난방과 농사용 기름 값 내려주겠다는 후보를 찾아야겠다. 도시 난방비와 비교해서 이런 곳에 사람이 돌아와서 살도록 하자면 1리터당 1300원이 넘는 난방용 기름 값이 500원까지 내려와야 될 것이다.

 

http://www.gnnews.co.kr/news/view.html?skey=%EB%B0%95%EC%A2%85%ED%9B%88&x=-1117&y=-80&smode=110&page=2&section=110&category=237&no=120839



교육 이야기 2018. 5. 1. 23:27

NGO포럼 인문학교실

NGO포럼 인문학교실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학교 교육 위기의 원인과 그 해법으로 도서관 활용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교육 이야기 2018. 5. 1. 23:17

스웨덴, 핀란드 교육에서 희망찾기


지난 19일, 황선준 서울교육연구정보원장과 부인 황레나 씨를 초청해 <스웨덴, 핀란드 교육에서 희망찾기>라는 주제로 진행된 다섯번째 생명토크에 참가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황선준 서울교육연구정보원장은 "스웨덴은 정답이 있는 사실 위주의 주입·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문제설정과 문제해결 위주의 교육을 한다. 남들이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문제로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창의력이다."라며 한국교육의 획일성을 문제점으로 지적해 주셨습니다. 

또한 황선준 원장은 아이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으로 키우려면 수능과 같은 평가를 바꿔야 한다고 꼬집었는데 이 부분은 한국 교육의 미래를 고민하는 분들과 심도있게 고민해봐야 하겠습니다.


 "실제로 아주 사소한 놀림 문제도 피해학생과 상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또 더욱더 깊이 개입해야 할 경우는 부모와도 상담을 한다"며 왕따문제 해결에 있어 학교와 부모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1박 2일 동안 진행된 이번 생명토크를 통해 많은 분들과 한국교육의 모순과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교육 문화 등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공간을 통해 우리 교육의 나아갈 방향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데 힘을 쏟아야겠습니다. 





기고글 2018. 4. 30. 22:34

위험과 사고의 예측 가능성(2011.03.17)

 어릴 때 우리 집은 큰길가에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산에서 목포까지 연결되는 2번 국도가 바로 우리 집 앞을 지났다. 우리 집에서 차표를 팔았기 때문에 집 앞이 정류장이었고, 차가 지나다니며 내는 비포장도로의 먼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했다. 우리 집은 가게를 운영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그 지역에서 가장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분명했다. 5일장이 서는 국도변에 있었고, 우리 집이 버스 정류장을 운영했으니 항상 집 앞에는 차와 사람들로 붐볐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차 조심이었다. 가게문 1m 앞이 도로였으니 교통사고의 위험이 상존하는 공간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사라면 최적지였지만 아이를 키우는 곳으로서는 최악의 공간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생업에 유리한 공간을 선택했지만 나의 부모님은 차 조심에 대한 끊임없는 강조를 통해 자식들의 안전도 확보해낼 수 있었다. 다행히 자라면서 우리는 한 번도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다. 8남매 모두 작은 사고도 한 번 없이 그 장소에서 장성할 수 있었으니 참 고마워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며칠 전, 이번에 대학원을 졸업한 딸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길을 건널 때, 실수로 엎어질 것도 생각해서 다시 일어나서 건너도 될 만큼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길을 건너야 한다. 아빠가 손을 잡고 길을 건널 때마다 이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 아이가 그렇게 들었다니 거짓말을 아닐 것이다. 그 덕에 두 아이도 크게 다치지 않고 자랄 수 있었고, 안전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교육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20년 전 초보 운전 때, 나는 큰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길이가 긴 트럭이 2차로에서 우회전을 하는 그 사이에 먼저 가려고 내가 3차로를 비집고 들어갔다가 그 트럭의 오른쪽 뒷바퀴에 내 차가 크게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법적으로는 3차로에서 하는 우회전이 우선이지만, 만약 경력이 있는 운전자였다면 그 상황에서 절대로 나처럼 3차로에 끼어드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길이가 긴 차는 회전 반경이 커서 2, 3차로를 같이 물고 우회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그 때 몰랐던 것이다. 
 교통사고는 내가 아무리 잘 해도 상대가 잘못해서 날 수 있다. 반대로 교통 사고라는 것은 상대가 웬만큼 실수를 해도 내가 그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만 잘 하면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방어 운전이라 한다. 나는 그 때 방어 운전의 개념을 몰랐다. 
 지금 일본은 난리가 났다. 지진과 해일로 해서 수 만 명의 인명 피해와 수십 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사고의 규모에 비해 일본인들의 위기 대처 능력과 높은 시민 의식으로 그 수습의 과정도 모범적일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오늘 방송에서도 이런 사고에서 그 흔한 약탈과 방화, 새치기 등의 무질서가 전혀 없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질서 의식과 준법정신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다. 방사능 유출이다. 피해 지역의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 4기가 차례로 폭발을 했다. 며칠을 두고 연쇄적으로 폭발을 해도 손을 쓰지 못했다. 하나가 폭발을 했을 때, 나머지 원자로에 대해 손을 쓰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우리는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
 지금의 폭발은 다행히 연료봉이 들어있는 격납고의 바깥에서 생긴 폭발이라지만, 지금 격납고 안이라고 해서 안전이 보장된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예측하고 대응하고 그래서 안전이 확보될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 원자력 사고는 그 범주를 벗어난다는 것에, 그리고 방사능 유출은 그 결과가 극도로 심각하게 드러난다는 것에 우리는 방점을 찍어야 한다.
 안전에 있어서 일본은 세계 제일의 나라다. 모든 건축물에서 내진 설계가 기본이고, 그들은 예측 가능한 모든 문제를 다 고려해서 원자력 발전소를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가 났고, 이번 사고는 그들의 예측 가능성의 범주마저도 벗어나버리고 말았다.
 교통사고는 끊임없는 교육과 예방 지도를 통해서 없애거나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운전자는 이른바 방어 운전으로 교통사고의 가능성을 크게 줄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방어의 개념을 뛰어넘는, 예측 불가능한 영역에서의 사고가 있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원자력 사고와 같은 대형 사고라면 우리는 모두가 한 무덤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원자력 사고의 불가측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되지 않은가.

 

http://www.gnnews.co.kr/news/view.html?skey=%EB%B0%95%EC%A2%85%ED%9B%88&x=-1117&y=-80&smode=110&page=2&section=110&category=237&no=120884


기고글 2018. 4. 30. 22:32

발목 잡힌 대중 시대의 복지와 사회적 합의(2013.04.09)

복지가 대세다. 영웅의 시대가 가고 대중의 시대가 되면서 대중의 표심을 사기 위해 정치는 경쟁적으로 복지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더더욱 수평적 정권교체를 경험한 이후 정치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우리나라의 정당은 복지로써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쓰고 있다. 과거 보편적 복지정책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며 보수적 이념을 지향하던 정당조차도 이제는 스스로 포퓰리즘을 지향하고 있다. 

교육문제에 있어 복지의 대표적 요소를 들라면 최근에 와서는 무상급식이었다. 대체로 진보적 교육을 주창한 교육감들이 무상급식을 그 공약으로 내세웠고, 많은 학부모들의 지지를 받은 이 정책은 다소 보수적인 이념을 지니고 있던 교육감조차도 무상급식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무상급식 이야기가 나왔을 때,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로 반대론자들은 무상급식을 비판했다. 그 돈으로 못사는 아이 두 명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그들의 논리는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논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주장은 빈부의 격차, 곧 사회 양극화 현상의 유지 또는 악화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혜자로서 감수해야 하는 낙인효과 같은 사회적 악영향도 있어 이미 상당 부분 설득력을 잃은 것으로 확인된다. 

사회복지와 함께 완벽한 교육복지를 자랑하는,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무상교육이 이루어지는 스웨덴과 핀란드 같은 선진국은 이미 보편적 복지가 대세다. 대중의 시대에 이미 정책공약으로서의 선별적 복지는 그 생명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에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확대하겠다고 공약을 했고, 아마 이 공약은 곧 실행될 것이라 생각한다. 농산어촌의 고등학교는 공납금을 제대로 내고 다니는 학생이 없을 정도로 이미 무상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제도적으로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도시지역의 고등학교로 확대되면서 고등학교 의무교육은 완성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누가 부잣집 아이에게는 공납금을 받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교육 복지정책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효율성에 갇혀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지금 농산어촌 학교는 학생 1인당 교육경비가 엄청나다. 학생이 10여 명에 불과한 학교가 있고, 이런 학교의 교직원은 학생보다 많다. 학생 1인당 연간 교육비가 5000만 원을 넘는 학교가 많다. 아마 그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도 그 이하의 경비로 유학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농산어촌 학교를 다 폐교를 시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최근 진주의료원 폐업방침의 강행으로 우리 지역이 시끄럽다. 폐업방침에 반대하는 도의원들이 곡기를 끊고 단식으로 항의하고 있다. 병원이 누적 적자가 심각하고 경영이 방만해서 앞으로도 그 적자의 폭이 줄어들 것 같지 않다는 것이 폐업의 이유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한 나라 한 지역의 복지정책을 가늠하는 중요한 공립병원의 존폐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도지사의 결심으로 정해져야 할 정책은 아닌 성싶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어떤 경우는 지나치게 앞서 나간다 싶을 정도로 이미 복지정책은 대중의 시대에 걸맞게 확대되어 나가고 있다. 거기다 복지정책은 효율성만으로 그 존폐를 논해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하다. 복지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더더욱 소외계층의 인격이 결부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손해를 보는 것이 전제가 되는 정책이 아닌가. 

절차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의사결정의 과정에는 의회와의 협의도 그렇고, 보건복지부와의 공감대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지역사회와의 사회적 합의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경영 정상화를 위한 노력도 그렇게 애쓴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이 문제를 오래 끌고 가면 사회적 손실이 심각할 것 같다. 지금이라도 이해 당사자와 정책 당국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서 원만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기관차처럼 마주 보고 달리다가도 극적인 합의로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 정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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