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학 영어 말고는 안 가르쳐 본 과목이 없는 것 같다. 개교 당시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석사 학위 이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딱 두 사람, 국어과 김혜란 선생님과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한 학사였다. 김혜란 선생님은 국어과라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사회 과목만으로는 규정된 시간을 채울 수 없었다. 그러니 몇몇 과목, 시간 강사를 쓸 수 있는 교과를 빼고는 다 내 차지였다.
1985년 3월, 그러니까 개교 2년째다. 신입생이 입학을 했는데 교가를 가르칠 선생님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옥상으로 신입생 전부를 데리고 올라가서 교가를 가르쳤다. 그 해 처음 오신 선생님들은 아마 내가 음악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곧 드러나고 말았지만.
1985년 2학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금요일 하루는 내가 맡은 수업이 다섯 시간이었는데 매 시간 다른 책을 가지고 들어갔던 때가 있었다. 사회1, 사회2, 윤리, 공업, 한문 다섯 과목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다. 교재 연구가 제대로 안돼서 진땀을 흘리며 수업을 한 날도 있었고, 다른 교재를 들고 들어간 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만물 박사였던지, 아니면 대충 때웠던지 둘 중에 하나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한테 미안할 뿐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 내가 들어갈 교실을 찾지 못해 아래 위층을 헤매다 땀이 흥건한 채 잠을 깨곤 한다. 20년이 더 지난 이야기다. 힘들었지만 열정 하나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이라면 그 때 만큼 열심히 할 자신은 없다.
가장 해내기 힘들었던 과목은 한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회와 윤리야 전공이었고, 음악도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노래방에서 박상철의 ‘황진이’를 부르면 노래 잘한다는 소리 안하는 사람이 없다. 공업은 당시 과목 이름이 ‘정보 사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두 분 다 공업 선생님이셔서 그랬던지, 어떻든 자신이 있었다. 참고서 두 권 정도 읽고 가면 무난히 때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한문은 달랐다. 시간이 없으니 모든 글자의 부수와 획수를 익히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학생 누군가가 그걸 물으면 답이 없었다. 자습서를 밑에 깔고 아이들에게는 눈속임을 하며 진땀을 흘린 기억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