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동정 2018. 6. 6. 21:20

6월 6일 호국보훈의 날

제63주년 현충일을 맞이하여,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마음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 더욱 열심히 뛰겠습니다.
늘 기억하겠습니다.



박종훈뉴스 2018. 6. 5. 10:54

"희망을 봤다" 양대노총, 박종훈 경남교육감 후보 지지


교육청 산하 기관 노동이사제 도입 등 담은 '정책협약' 맺어

(창원=연합뉴스) 김선경 기자 =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경남본부는 5일 경남도교육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생 존중, 노동 존중 교육 공동체를 위해 박종훈 경남교육감 후보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양대노총 경남본부는 "아이들이 노동의 권리를 깨우치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학교에서부터 노동 권리가 보장되고 노동 가치가 존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종훈 경남교육감 4년 동안 경남교육의 희망을 봤다"며 "앞으로 4년, 희망을 더 키우고 나누겠다. 경남 진보교육자치 2기를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 후보는 "아이들이 노동 인권을 존중하고 세상에 나가서 떳떳한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잘 가르치겠다"며 "기필코 압도적 지지로 당선돼 양대노총 경남본부 지지에 보답하겠다"고 화답했다.

양대노총과 박 후보는 노동인권교육 확대, 교육노동자 기본권 보장, 교육공동체 건설을 핵심으로 하는 정책 협약서에도 서명했다.

협약서에는 교육현장 내 직위·직급·직종 간 갑질·차별 금지, 교육청 산하 기관 노동이사제 도입 등 내용이 담겼다.

후보 동정 2018. 5. 25. 09:46

개소식에 찾아주신 분들의 지지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어제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찾아주신 분들의 지지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6월 13일 꼭 승리하여 내 아이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감이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후보 동정 2018. 5. 15. 23:37

오늘 하루 현장을 다녔습니다.

오늘 현장방문을 통하여 인사를 나누면서 경남교육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나의 이야기 2018. 5. 12. 22:17

학생이 중심인 경남교육 교육감이 더 배웁니다!


박종훈뉴스 2018. 5. 9. 16:21

박종훈 경남교육감 "1년 반 무상급식 중단해 아쉬웠다"

출처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32503&CMPT_CD=P0001&utm_campaign=daum_news&utm_source=daum&utm_medium=daumnews


재선에 도전하는 박종훈 경남도교육감은 홍준표 전 경남지사에 의한  '무상급식 중단' 때를 언급하면서 "1년 반을 무상급식 때문에 허비했던 부분이 아쉬웠다"며 "급식의 질적 향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재선이 되면 허비했던 1년 반을 급식의 질을 제대로 확보하는 것으로 아이들한테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박 교육감은 9일 오전 경남도교육청 브리핑실에서 출마선언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홍준표 전 지사 때인 2014~2015년 사이 무상급식 중단 사태로 홍역을 치렀다.

경남지역 무상급식은 경남도청과 경남도교육청, 시군청이 예산(식품비)을 분담해 왔다. 그런데 홍준표 전 지사가 당시 예산 지원을 끊어 무상급식이 한때 중단되었다.

박 교육감은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선거 때만 되면 무상급식을 다 꺼낸다. 그런데 정작 당선되고 나서 말 바꾸기를 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다시 교육감이 되면 급식의 질을 챙기겠다"며 "지난 7년간 급식 단가에 대해 손을 대지 못했다. 물가 상승도 있었지만 공동구매와 시설개선 등으로 해결해 왔다"며 "학부모들은 돈을 낼테니 급식의 질을 높여 달라는 요구도 한다. 그것은 무상급식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남지사가 누가 될지 모르지만 협조가 잘 되면 분담하고, 단가 조정해서 제대로 된 급식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자유한국당 김태호 경남지사 후보가 '무상급식 공약'을 내건 것과 관련해, 그는 "보도를 통해 알았고, 동지역 고등학교까지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했는데, 거기에는 식품비 분담만 들어 있었다"며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 대해 다른 지역에서는 지자체와 교육청이 공동분담하는데 우리는 교육청이 맡고 있다. 이것을 포함해서 시설비와 운영비 등의 분담에 대해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교육복지 이야기도 꺼냈다. 박 교육감은 "교육복지는 앞으로 끊임없이 확대될 것이라 본다. 고등학교 수업료나 급식은 시간의 문제다"며 "앞으로 교과서와 수학여행비, 교복비, 체육복비 등으로 나아갈 것이라 본다. 양적 확대 못지않게 질적 향상이 급선무다"고 했다.

박종훈 교육감은 "교육혁신을 넘어 미래교육으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감이 되겠다"는 제목의 출마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가르침에서 배움으로, 이제는 학생 중심의 교육으로 바뀌었다", "발로 뛰며 지켜낸 아이들의 안전, 경남의 자랑이 되었다", "소통하는 교육감이 되고자 노력했다", "지속적인 교육혁신으로 아이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을 실현하겠다"고 했다.

'내 아이의 미래는 책임지는 교육감'이라는 구호에 대해, 박 교육감은 "반듯한 아이, 순응하는 아이보다는 미래의 역량을 갖춘 아이, 문제해결 능력을 가진 아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라며 "교육이 지식과 정보 중심이 아닌 역량 중심으로 해서, 그 역량이 바뀌어 가는 세상을 적응하는데 필요한 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 했다.

박종훈 교육감은 이후 선거관리위원회를 찾아 예비후보 등록했고, 오후에는 봉하마을을 찾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참배에 이어 권양숙 봉하재단 이사장을 예방하며, 국립3.15민주묘지와 창원 충혼탑을 참배한다.

박 교육감은 차재원 전 전교조 경남지부장과 '촛불경남교육감 후보' 단일화를 시도하고, 오는 24일 사무소 개소식을 연다.

교육 이야기 2018. 5. 7. 19:44

2018 경남 어린이날 행사 방문 영상

2018 경남 어린이날 행사 방문 영상입니다.

경남과학교육원과 명서초등학교 그리고 경남수학문화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기고글 2018. 5. 3. 23:36

낙동강 친수공간을 바라보는 청개구리(2011.08.09)

낙동강가에 사는 덕에 매일 그 강을 옆으로 끼고 다닌다. 주변 경관이 좋기도 하지만,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해가 지는 때다. 귀가하는 방향이 마침 서쪽이기도 해서 더욱 그렇다. 가끔씩은 집을 지나서 임해진까지 더 달려가기도 한다. 깎아지른 절벽길을 느린 속도로 운전하며 하늘의 지는 해와 강에 비치는 노을을 같이 보는 때면, 어릴 적 황금빛으로 저녁을 맞던 내 고향 동네 적석산의 모습에 견줄만큼 내겐 황홀한 그림으로 다가온다. 
 4대강 사업이 겉모양이 바뀌고 있다. 달포 전부터 ‘준설 완료, 친수공간 조성’이라는 플래카드가 강가와 강 가운데 인공섬에 아주 크게 새겨져 있다. 폭풍 같은 모래 먼지와 굉음을 내며 달리던 대형 덤프트럭이 거의 없어졌다. 
 준설 완료야 강바닥의 모래를 목표치만큼 파냈다는 것으로 쉽게 이해가 되었지만, 친수공간 조성이라는 말은 내겐 많이 낯설었다. 주변의 환경운동가에게 물으니, 강가에 탐방로, 놀이공간, 체육시설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하, 그래서 내가 다니며 바라보는 강 가운데 인공섬에 얼마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뭔가를 심고 가꾸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 모습이 정리가 됐다. 체육공원과 산책로라는 것은 인근 창녕 길곡을 지나며 강쪽을 바라보면 이미 부분적으로 만들어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얼마 전 장마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환경운동하시는 분 몇 분과 함께 삼랑진에서 합천보까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 구간에는 함안보와 합천보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내가 본 낙동강 친수공간 사업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모래 위에 지은 집, 이른바 ‘사상누각’이었다. 
 함안보도 합천보도 홍수로 유실된 생채기를 우선 안보이게 하는 눈가림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거적과 잡초로 위장해 놓은 준설하고 남은 경사지는 씻겨 내려가지 않은 곳이 없었고, 낙동강에 합류하는 작은 하천이 받은 상처는 그 동네 주민의 입을 빌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합천보 상류의 덕곡천은 복구 불가능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를 10여 년 전부터 나들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평균 1년에 두 세 차례 낙동강은 홍수를 겪는다. 강바닥을 파내서 그런지 올해 장마 때는 평년보다 더 많은 비가 왔지만 낙동강 본류가 홍수로 넘치지는 않았다. 상류 지역에 비가 많이 오면 낙동강은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도록 수량이 많아진다. 평소에는 강 가운데 큰 섬이 보이지만 비가 많이 오면 건너편 창원쪽까지 강폭이 1 km가 넘게 물이 차면서 강이 거의 바다가 된다. 지난 번 장마 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 놓은 탐방로는 지붕까지 물이 찼고, ‘준설 완료, 친수공간 조성’의 플래카드도 물에 잠겼다. 
 이번에는 잠겼던 탐방로에 물이 빠지면서 급하게 씻고 고쳐서 복구를 했고, 씻겨 내려간 인공섬도 다시 잔디를 심고 또 나무도 심어서 급하게 상처를 감추었지만, 앞으로도 물만 넘치면 그렇게 신속하게 씻고 닦고 다시 심어서 시민들게 보여 줄 것인가. 1년에 세 번 이상일 수 있는 일을 말이다. 
 필자는 토목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강의 안쪽은 언제나 물에 잠길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모래는 물살이 세면 씻겨가게 되어 있다. 그 안에 탐방로를 만들고 체육공원을 만들고 놀이 시설을 하면 우선 보기는 참 좋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시설을, 농사짓기에 바쁜 강가의 주민들이 얼마나 이용할 것이며, 홍수에 잠겼다 물이 빠지면 청소와 관리는 누가 할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겐 걱정일 뿐이다. 한눈에 봐도 수만 평이 넘는 그 공간을 물과 햇빛만 있으면 과수보다 훨씬 잘 자라는 그놈의 잡초는 또 누가 베어낼 지, 백 평 남짓 농사를 짓는 내가 생각해도 걱정과 함께 한숨부터 나온다. 
 교육운동가가 아니고 더욱이 환경운동가도 아닌 시골의 한 촌부가 느끼는 이런 마음은, 오늘 점심 때 모여서 같이 밥을 먹었던 여섯 명 이웃 사람 모두의 하나같은 마음이었다. 태풍 ‘무이파’의 영향으로 이 저녁 비바람이 우리 동네를 휘둘러 지나가고 있다. 모래 위에 항구적인 시설물이 가능한 것인지 오늘 밤은 또 걱정이다.



나의 이야기 2018. 5. 3. 23:10

내가 가르쳐 본 과목

나는 수학 영어 말고는 안 가르쳐 본 과목이 없는 것 같다. 개교 당시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석사 학위 이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딱 두 사람, 국어과 김혜란 선생님과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한 학사였다. 김혜란 선생님은 국어과라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사회 과목만으로는 규정된 시간을 채울 수 없었다. 그러니 몇몇 과목, 시간 강사를 쓸 수 있는 교과를 빼고는 다 내 차지였다. 


1985년 3월, 그러니까 개교 2년째다. 신입생이 입학을 했는데 교가를 가르칠 선생님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옥상으로 신입생 전부를 데리고 올라가서 교가를 가르쳤다. 그 해 처음 오신 선생님들은 아마 내가 음악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곧 드러나고 말았지만. 


1985년 2학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금요일 하루는 내가 맡은 수업이 다섯 시간이었는데 매 시간 다른 책을 가지고 들어갔던 때가 있었다. 사회1, 사회2, 윤리, 공업, 한문 다섯 과목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다. 교재 연구가 제대로 안돼서 진땀을 흘리며 수업을 한 날도 있었고, 다른 교재를 들고 들어간 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만물 박사였던지, 아니면 대충 때웠던지 둘 중에 하나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한테 미안할 뿐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 내가 들어갈 교실을 찾지 못해 아래 위층을 헤매다 땀이 흥건한 채 잠을 깨곤 한다. 20년이 더 지난 이야기다. 힘들었지만 열정 하나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이라면 그 때 만큼 열심히 할 자신은 없다. 


가장 해내기 힘들었던 과목은 한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회와 윤리야 전공이었고, 음악도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노래방에서 박상철의 ‘황진이’를 부르면 노래 잘한다는 소리 안하는 사람이 없다. 공업은 당시 과목 이름이 ‘정보 사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두 분 다 공업 선생님이셔서 그랬던지, 어떻든 자신이 있었다. 참고서 두 권 정도 읽고 가면 무난히 때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한문은 달랐다. 시간이 없으니 모든 글자의 부수와 획수를 익히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학생 누군가가 그걸 물으면 답이 없었다. 자습서를 밑에 깔고 아이들에게는 눈속임을 하며 진땀을 흘린 기억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 2018. 5. 2. 21:45

풀리지 않는 그 무엇, 그 해결을 위해

내가 ‘박사님’이 되니까 우리 집안의 ‘선배 박사’들이 “박사학위를 딴 것은 새로운 시작에 불과하고 이제부터는 사회에 봉사해야 된다”고 점잖게 충고를 했다. 우리 집안의 막내인 내 남동생 내외는 미국에서 각각 전자전기, 생물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학문적 선진국으로서의 미국의 정서와 최근 분위기를, 특히 지역공동체와 봉사활동의 관계를 거듭 강조했다. 나도 우리 사회에서 ‘교육’ 문제를 부둥켜안고 20년 넘게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고민과 번민을 거듭하며 나름대로 교육 운동을 해 온 사람으로서, 동생의 제언에 용기와 함께 작은 오기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어쨌든 내 머리 속 한 구석에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당위가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이때까지 내 시야에는 학교와 학생, 교육운동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었고,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전교조를 선택했다. 하지만 전교조로서도 풀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전교조가 합법화됐지만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학교가 요구하는 것은 공부 잘 하는 아이와 명문대 진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 역시 우리 교육이 정상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학교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많았다. 상위 10%가 아닌 평범한 다수의 학생들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우리 교육계를 위해서 내가 배운 것을 써 먹고 싶었다. 내 스스로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박사학위 논문의 소재는 우리나라 최초로 노사정 합의로 이루어진 1기 노사정위원회 활동이었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하나의 의견과 주장이 돼 제대로 실현이 되는 것은 없었다. ‘국가 부도’라는 위기 앞에서 나온 노사정 합의가 노사정위원회였다. 

나는 우리 교육계의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모아 토론하고 설득해서 합의를 이끌어내고 실제 현실에서 차근차근 변화를 만들어 나가고 싶었다. 참교육을 내걸며 전교조가 세상에 나오면서, 한국교총은 과거에 비해 선명성과 대표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부는 무너지는 공교육을 정상화하기는커녕 변화하는 현실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6개월 넘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다 ‘교육위원’ 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결심을 하고 나니 마침 교육위원 선거제도까지 바뀌고 있었다. 이전 교육위원 선거에서는 학교운영위원장들이 교육위원을 선출했는데, 2002년 교육위원 선거에서는 학교운영위원들 전부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렇게 되면 승산이 있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1996년 학교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사와 학부모가 학교운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긴 제도였다. 나로서는 학교운영위원 가운데 상당수가 학교의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자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