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8. 5. 2. 21:45

풀리지 않는 그 무엇, 그 해결을 위해

내가 ‘박사님’이 되니까 우리 집안의 ‘선배 박사’들이 “박사학위를 딴 것은 새로운 시작에 불과하고 이제부터는 사회에 봉사해야 된다”고 점잖게 충고를 했다. 우리 집안의 막내인 내 남동생 내외는 미국에서 각각 전자전기, 생물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학문적 선진국으로서의 미국의 정서와 최근 분위기를, 특히 지역공동체와 봉사활동의 관계를 거듭 강조했다. 나도 우리 사회에서 ‘교육’ 문제를 부둥켜안고 20년 넘게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고민과 번민을 거듭하며 나름대로 교육 운동을 해 온 사람으로서, 동생의 제언에 용기와 함께 작은 오기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어쨌든 내 머리 속 한 구석에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당위가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이때까지 내 시야에는 학교와 학생, 교육운동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었고,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전교조를 선택했다. 하지만 전교조로서도 풀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전교조가 합법화됐지만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학교가 요구하는 것은 공부 잘 하는 아이와 명문대 진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 역시 우리 교육이 정상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학교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많았다. 상위 10%가 아닌 평범한 다수의 학생들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우리 교육계를 위해서 내가 배운 것을 써 먹고 싶었다. 내 스스로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박사학위 논문의 소재는 우리나라 최초로 노사정 합의로 이루어진 1기 노사정위원회 활동이었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하나의 의견과 주장이 돼 제대로 실현이 되는 것은 없었다. ‘국가 부도’라는 위기 앞에서 나온 노사정 합의가 노사정위원회였다. 

나는 우리 교육계의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모아 토론하고 설득해서 합의를 이끌어내고 실제 현실에서 차근차근 변화를 만들어 나가고 싶었다. 참교육을 내걸며 전교조가 세상에 나오면서, 한국교총은 과거에 비해 선명성과 대표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부는 무너지는 공교육을 정상화하기는커녕 변화하는 현실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6개월 넘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다 ‘교육위원’ 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결심을 하고 나니 마침 교육위원 선거제도까지 바뀌고 있었다. 이전 교육위원 선거에서는 학교운영위원장들이 교육위원을 선출했는데, 2002년 교육위원 선거에서는 학교운영위원들 전부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렇게 되면 승산이 있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1996년 학교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사와 학부모가 학교운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긴 제도였다. 나로서는 학교운영위원 가운데 상당수가 학교의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자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