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8. 5. 2. 21:50

“학교 뒤 대밭에 뼈를 묻자”던 약속을 뒤로 하고

2002년 8월 31일, 이 날은 토요일이었다. 학교 선생님으로서는 마지막 날이었다. 교육위원과 교사를 겸직할 수는 없다. 대학 교수는 겸직이 가능하나 교사는 사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었다. 참 이상한 제도였다. 교내 방송으로 조촐한 퇴임식이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에게 내가 학교를 떠난다는 걸 알렸다. 아이들이야 나의 재직 20년 긴 시간에 대해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가질 리 없건만 나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창원 문성고가 개교하는 첫 날부터 함께 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스물 다섯이었습니다. 계산을 해 보니 제가 문성고에서 정년퇴직을 한다면 42년 동안 근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 함께 계셨던 선생님들과 “학교 뒤 대밭에 우리의 뼈를 묻자”며 신설 학교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결의를 다졌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18 년 6개월을 근무하고 저는 오늘 학교를 떠납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결코 문성고를 떠나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초임교사 시절에 야간자율학습 빼먹고 도망가는 아이들을 잡기 위해서, 가출한 놈이 혼자 놀기 싫어 친구들을 불러내려고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학교로 잠입하는 놈들을 체포하기 위해, 많은 날들을 학교 근처 솔밭과 풀밭에서 형사처럼 잠복근무를 하기도 했다. 그 때 내 심정은 ‘죽어서도, 그러니까 대밭에 묻혀 있더라도 이놈들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참 대단한 열정이었다. 

오랫동안 근무를 하다 보니 챙겨야 될 물건들이 많았다. 이사 가는 것처럼 자동차에 한 가득 물건을 담아 싣고는 학교를 나섰다. 지금 나가는 이 교문은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형사들이 학교로 찾아오자, 아이들이 당시 전교조 분회장이던 나를 지키겠다고 우르르 몰려 나와 떡하니 지키고 서 있었던 그 교문이었다. 나 역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 교문을 나서는 것이라고 다시금 맹세를 했다. 

아무튼 기분은 묘했다. 스스로 약속한 42년을 못 채웠으니 공부하기 싫어 땡땡이 치고 도망가는 느낌과 함께, 한편으로는 과거급제해서 암행어사라도 된 기분이 뒤섞였었다.